15일 저녁 9시 온라인 무크지 ‘보풀 사전’에 한강 작가의 ‘깃털’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보풀 사전’은 한강 작가가 이햇빛, 전명은, 최희승 작가와 함께 만드는 온라인 무크지로 구독을 신청하면 네 작가가 쓴 글을 받아볼 수 있다. 이 곳에 노벨문학상 수상 뒤 한강 작가의 첫 글이 공개된 것.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이 글은 깃털과 할머니의 흰머리, 웃는 얼굴, 전구 빛이 ‘흰’ 이미지로 연결된다. 마지막 문장의 ‘빛’이 의미심장하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흰색’은 겨울과 눈의 작가 한강 작가가 책으로도 제목 짓고(‘흰’) 쓸 만큼 좋아하는 이미지다. 흰 이미지들이 밝히는 밝은 기운이 읽는 사람에게 따뜻함을 전해준다.
깃털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큰아들이 태어난 뒤 막내딸을 얻기까지 십이 년에 걸쳐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의 둘째 아이인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 외가로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라오던 아침, 발톱을 깎아드리자 할머니는 ‘하나도 안 아프게 깎는다… (네 엄마가) 잘 키웠다’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쓸었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했던 인삿말을 그날도 하셨다. 아프지 마라. 엄마 말 잘 듣고. 그해 10월 부고를 듣고 외가에 내려간 밤,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볼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잡고 병풍 뒤로 가 고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전작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쓰는 동안 슬럼프가 있었어요.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저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으로 뚫고 나왔거든요. 나는 지금 글을 쓰기 어려운 상황인데, 좀 더 크게 생각해서, 말을 잃은 사람에 대해 쓰면 어떨까?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세계를 잃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빛을 잃어가는 사람과 말을 잃어가는 사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자. 그렇게 스케치를 시작했고요.”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희랍어시간』(2011)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희랍어 강사이고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그의 수강생이다. 하나의 기관이 제 역할을 잃어가면, 다른 기관들이 그만큼 예민해진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문장이 한껏 예민해져 있다. 그 둘은 어떻게 서로 인식하고 서로에게 다가갈까. 두 눈으로만 읽어내려 갈 문장이 아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을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한 교실 안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사는 두 사람 사이에는 희랍어가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문자. “8년 전쯤 희랍어 철학을 하는 분을 만났어요. 고대 희랍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학문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무 함축적이다 보니 어순을 마음대로 쓴다는 거예요. 한 단어 안에 문법이 다 들어가 있어서 굳이 어순을 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요.” 희랍어 문법은 규칙이 대단히 까다롭다. “동사들은 주어의 격과 성과 수에 따라, 여러 단계를 가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태에 따라 일일이 형태를 바꾼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p.20)”
소설의 문장도 희랍어를 닮아있다.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다. “최대한 정확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려고 하는 말, 쓰려고 하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옮기려고 하다 보니 행간을 띄우기도 하고, 이탤릭체로 기울이기도 했어요. 정황과 감정을 최대한 전달하려는 실험적인 시도였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소설
『희랍어 시간』은 깊은 바다 같았다. 검은 물속에서는 굉장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표면은 멈춰 있는 듯 무심하게 수평선 근처를 찰랑거리는 바다. 각자 아픈 기억과 폐쇄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독자들은 문장을 통해 그들의 속내를 비밀스럽게 엿본다.
한강 작가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음색이 문장의 결과 톤을 닮아있었다. 정확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며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문장처럼, 은은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모르게 바짝 상체를 그녀 쪽으로 당겨 귀를 기울여야 했다.
“아직 소설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에요. 『바람이 분다, 가라』는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 책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 소설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희랍어시간』은 그것과 또 다르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함축적으로 쓰고, 결말을 열어둬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을 아끼고, 꾹꾹 누르듯이 써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에요.”
말과 빛을 잃어가는 사람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는, 인물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써나갔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늘 생각했어요. 불투명한 비닐을 눈에 대고 있어보기도 하고요. 그분들이 읽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염려도 되고,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말 잃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세세한 감각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무언가 잃어가는, 잃어버린 인물들이지만, 삶은 계속된다. “생명은 소멸에 저항하잖아요. 손톱 자르다 살을 자르면, 잘린 살점은 금방 썩어버리지만, 피가 흐르는 손은 썩지 않잖아요. 그런 생명과 소멸의 관계. 침묵과 말의 관계. 아주 긴밀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그런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안에서 어둠 속에 목소리만 남은 사람과 말을 잃었다가 찾는 사람의 이야기는 제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거죠.”
인터뷰 초입에서 한강 작가는 이 소설 역시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하는 거라면, 그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혹시 소설을 끝낸 지금은 찾게 되었을까.
“인간의 연한 부분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고 할까요. 두 인물이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았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 서로 침묵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연한 부분에서 삶을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소설에 기울여져 사는 삶이 좋아요
한강 작가의 아버지는 한승원 소설가. 오빠 한동원 씨 역시 소설가고, 남편인 홍용희 씨도 문학평론가로 활동한다. 그야말로 문학 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자랐고, 살아왔다. 뭔가 특별히 다른 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문학에 대해 남들보다 더 얘기하지 않는다”라며 웃는다. 하지만 책이 있는 집, 책을 읽는 가족 사이에서 자란 소녀는 남들보다 문학, 언어에 좀 더 예민하지 않았을까.
“집에 책이 많았어요. 책을 아무 데나 내버려두는 집이었고, 정리정돈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누가 뭘 하든 내버려두는 분위기여서, 그땐 아이 책이든 어른 책이든 상관없이 책을 읽었죠. 사춘기 때 접어들어 고민이 생겼고, 그 고민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기도 했죠. 인간이 뭘까. 사람은 다 죽는 걸까. 우리가 정말 다 죽어야 하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왜 아플까. 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뜻도 모르고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 대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답을 찾았을까? “답을 주는 책은 없구나,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웃음) 다들 정말 훌륭하고, 나이 많은 분들이 쓰신 책이지만, 결론은 항상 이들도 나처럼 잘 모르고,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이들에게도 큰 고통이었단 거였어요. 우린 다 비슷하구나. 답은 없네.”
한강 작가에게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물었다. “숲”이란다. 소설에서도 ‘숲’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p.14)”
글을 쓰다가 슬럼프도 겪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언어를 밀어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이 작가에게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함을 안고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일까. 이 소설만 해도 2년이 걸렸다고. 그 소설이 무엇을 주길래, 한강 작가는 끊임없이,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것일까.
“2년여 동안은 이 소설하고 살면 되니까, 그런 상태가 좋아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사이가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하기보다,) 제 모든 걸 소설에 기울여,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좋아요. 그게 균형 잡힌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삶에 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그런 상태.”
등단 초기만 해도, 첫 창작집을 1년여 만에 써낼 정도로 부지런히 발표했으나, 퇴고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작품을 붙들고 있는 속도가 길어졌다. “썼던 것도 다시 보고, 늘 글을 붙들고 있지만, 결과물은 빨리 나오지 않는.(웃음) 창작집도 내야 하는데요. 2000년에 창작집을 냈는데, 내년에 새로 내면 12년 만에 내게 되는 셈이에요.(웃음) 문제는 그게 13년 되고, 14년 될까 걱정되는 거죠.(웃음)”
등단 초와 비교했을 때, 글을 쓰던 속도도 다르고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한강 작가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쓸 수 있는 최대치를 독자들 앞에 내보이고 있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창작 강의를 할 때, 그녀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조급해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좋은 욕심이긴 한데 조급하면 힘이 드니까요. 좋은 작품으로 바로 등단하기보다는, 그런 작품을 서너 편 갖고 있을 때 등단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재미있게 쓰는 게 좋은 거라고 얘기해줘요. 아이들에게 최대한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영향을 미치니까요.”
2011년, 『희랍어 시간』 속에서 잘 보냈다는 한강 작가는 올 한 해를 좋게 기억할 것 같다며 웃었다. “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많아요. 빨리 쓰지 못하는 게 늘 아쉬운 점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어떤 이미지로 머릿속에 있어요. 거기에 최대한 근접하려고 노력해요. 거기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추동력이에요.”
『희랍어 시간』을 보낸 지금은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보내고 있을까. “이 책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저의 가장 밝은 대답인데…… 더 밝은 대답을 써보고 싶어요!(웃음)”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p.84)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 속 주인공인 고 문재학 열사가 과거 한 작가의 집 근처에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이 소설은 당시 ‘막내 시민군’ 문 열사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 동호의 아픔을 다뤘다.
과거 한 작가의 생가가 있었던 광주 북구 중흥동을 찾아갔다. 한 작가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는 기존 건물을 허문 뒤 1997년 2층 조립식 주택이 들어섰고, 현재 휴대전화 판매점으로 운영 중이었다.
한 작가는 1977년 광주 북구 효동초에 입학해 1979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광주에 살 당시 그의 생가는 효동초에서 500m 거리였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문 열사의 집은 효동초 바로 옆이었다. 문 열사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이 집에 살았다. 한 작가와 문 열사의 집은 직선거리로 280m 떨어져 있었다. 효동초는 5·18민주화운동이 처음 시작된 전남대 정문 근처에 있다.
광주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문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숨졌다.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묘지에 가매장됐다가 10일 후 가족들에 의해 신원이 확인됐다.
문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85)는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가 2010년경 효동초 인근 집을 찾아와 두 시간 동안 아들의 사연을 듣고 갔다”고 했다. 김 씨는 당시 한 작가에게 “1980년 6월 7일경 생사불명이던 아들이 가매장된 망월동 묘를 파 보니 관이 2cm 두께의 너무 얇은 합판으로 만들어져 관을 들면 시신이 떨어질 것 같았다. 시신은 알몸 상태로 광목천에 싸여 있었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김 씨는 “노벨 문학상 뉴스를 보고 기쁨과 고마움의 눈물이 흘렀다. 소설로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줘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문 열사의 누나 미영 씨(62)는 “한 작가가 같은 동네에 살았던 동생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은 우연이지만 동시에 인연”이라고 했다. 한편 광주시는 이날 한 작가의 부친 한승원 작가와 딸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사업과 관련해 논의했다. 한승원 작가는 “딸은 (문학관 등) 모든 건물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54) 작가의 숨결이 닿은 장소를 따라 시민들의 ‘문학 성지순례’가 이어지면서 서울 종로구 서촌 일대가 들썩이고 있다. 서촌은 한강의 서울 자택과 그가 운영하는 책방이 위치한 동네다.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집 겸 작업실로 알려진 종로구 통의동의 한옥 주택 문이 굳게 잠겨 있었지만, 전날까지만 해도 대문 앞에 즐비했던 문학 관련 단체·재단의 축하 화환과 꽃다발들은 자취를 감춘 모습이었다.
앞서 주말이었던 지난 13일 이곳을 지나가던 관광객들은 한강 작가의 집이라는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 도란도란 책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증 사진을 찍기도 했다.
경기 분당에서 아내와 함께 서촌을 찾은 한재원(65)씨는 “평소 한강 작가의 팬이라 좋은 기운을 받으러 한강의 책방부터 집 앞까지 발자취를 따라와 봤다”며 “이왕 온 김에 윤동주 하숙터·이상의 집 등 서촌 곳곳 문학 관련 스폿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데이트를 나온 이모(28)씨도 “서촌에 자주 놀러 왔지만, 이번엔 감회가 새롭다”며 “옛 예술가들이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 보고 있다”고 했다.
이날 한강이 자택 인근 통의동에서 운영하는 독립서점 ‘책방오늘’은 휴업 상태였지만,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앞서 지난 11일 책방오늘은 수상 발표 후 몰려드는 손님과 취재진에 “당분간 책방을 쉬어간다”며 “다시 문 여는 날은 후에 공지하겠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임시 휴업 소식을 전했다.
일부 문학 팬들은 한강의 책을 들고 책방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인증 사진을 찍기도 했다. 책방 간판 아래서 기념 촬영을 하던 무악동 주민 김모(70대)씨 부부는 “문학계의 경사이며 한국의 경사”라고 감격했다.
책방 문 앞엔 시민들의 꽃다발들과 “아프고 서러운 시절을 지나온 이에게 위로이며 희망”이라는 이웃 주민의 쪽지와 “내 나이 70 평생 이렇게 설렌 날이 있었는지, 내 생애 이런 순간이 오다니 감사하고 용기에 박수 드린다”는 노인의 편지도 놓였다.
동네 상인들은 수상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발자취가 담긴 장소에도 덩달아 활기가 돌았다. 서촌 한옥마을에는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터와 이상 시인의 집터, 박노수 화백의 미술관 등이 위치해 있다.
인왕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던 A씨(30대)는 누상동의 윤동주 하숙집터 앞에 잠깐 서서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시인을 소개하고, 한강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재영 종로구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은 “문학·예술계 거장을 배출한 종로가 한강 작가의 수상 덕에 문화 중심지로 한 번 더 발돋움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종로구청은 통인시장 앞에 ‘630년 종로의 자랑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종로문화재단 관계자는 “한강 작가 수상을 기념해 구청과 관련 행사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한강에 대한 목격담을 말하기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였다. 한강 자택 인근의 한 식당 사장은 “우리 집 음식이 소화가 잘 된다며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끼도 드시고 가셨다”며 “(지나가는 행인들이 혹시나 알아볼까봐) 창가 쪽엔 절대로 앉지 않았다”고 말했다. 근처의 한 카페 사장은 “평일에 (한강 작가님이) 자주 오셨지만, 그 이상은 노코멘트 하겠다”고 했다.